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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궁 은행나무거리, 신주쿠 교엔, 신주쿠 빔즈, 시부야 카부쿠라 라멘 본문
어제 분명 늦은 밤에 잠든걸 기억한다.
하지만 아침에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눈이 부셨다.
어젯밤 멋진 야경을 보여주던 창가는 아침 해가 강렬하게 들어오는 통로였다.
조금씩 방안이 따뜻해지는게 느껴졌다.
서울 내 방은 해가 잘 들어오지 않고, 그마져도 블라인드로 가려놓고 살았는데, 아주 오랫만에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본다.
강한 온기를 느껴보았다.
렘 롯폰기 호텔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매일 500 mL물 두 통을 공짜로 준다는 것이다.
나처럼 많이 걷는 여행자에겐 더없이 좋다.
오늘의 날씨는 이번 여행중 가장 쌀쌀한 날씨였다.
오후에 비도 예정되어 있었다. 가지고 온 옷 중 가장 따뜻한 조합으로 옷을 입고, 매일같이 입던 통 넓은 편한 청바지를 입고 숙소를 나섰다.
먼저 지하철역에 잠시 들러 한국에서 결제했던 도쿄 메트로 24, 72시간권을 발권했다.
QR코드를 인식하면 바로 발권이 된다.
앞으로의 여행에서 나의 발이 되어줄 것이다.
오늘의 조식은 호텔 맞은편 마츠야 롯폰기점이다. 우리나라의 김밥천국 같은 곳으로 덮밥(규동)을 주로 팔고 있다.
즐겨보던 유튜브 채널에서 마츠야 추천 조합을 적어 왔다.
입구 자판기에서 한국어 설정을 누른 후, 파채 규동에 계란 추가하고 샐러드와 장국을 추가했다.
가격은 900엔 정도
테이블마다 칸막이가 되어 있어서 눈치보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규동에 장국이 있는데 숫가락을 주지 않는 것에서 일본에 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밥 양을 기본으로 했는데, 많은 양으로 했으면 배 터질뻔 했다.
생각보다 아주 배부른 아침 식사를 끝마치고 이날의 여행을 시작했다.
아주 옛날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성 안쪽을 걷다가 작은 이발소를 발견한적 있다. 그때부터 언젠가 여행을 가면 여행의 시작을 그 나라의 바버샵에서 머리를 자르고 면도를 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다는 작은 꿈을 꾸었다.
게다가 나는 언제부턴가 잠이 잘 오지 않을때마다 바버샵 영상을 보는걸 즐겼다.
도쿄에서의 여행 시작을 새로운 헤어스타일과 깔끔한 날면도 그리고 귀청소로 시작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 일이었다.
여행 오기전 정말 많은 도쿄 바벼샵의 영상을 보았고 몇몇 후보가 있었지만, 결국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바버샵을 선택했다.
온라인 예약으로 내가 일본어를 못하는 것과 간략하게 내가 원하는 헤어스타일에 대해서 코멘트를 남겨 놨었다.
오픈은 10시였기 때문에 잠시 주변 공원을 걸었다.
21_21 디자인 사이트가 있는 히노키초 공원이다.
아침이라 선선한 바람이 불어 걷기 좋았다.
나무 하나에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을 해서 연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화요일은 21_21 디자인 사이트의 휴무일이다.
맞은편에는 전등을 이용한 설치 작품이 있었다. 6분마다 한번씩 연출된다고 하는데, 바버샵 약속한 시간이 되어 가봐야했었다.
오픈 시간에 맞춰 방문 했다.
젊은 바버는 영어를 잘 못했고 우리는 손발짓과 짧은 소통으로 원하는 스타일을 맞춰갔다.
나는 분명 예약 페이지에 원하는 스타일을 잘 적어놓았다 생각했는데 전달이 안된 것 같았다.
그래도 바버는 최선을 다했다. 세 종류의 클리퍼 팁을 가져와서 어떤 길이로 자를지 먼저 물어보았다.
머리 섹션을 따고 팁이 깊숙히 들어왔다. 염색한지 한달 밖에 안된 검은 머리들이 우수수 잘려나가고 숨어있던 흰머리들이 집단으로 들어났다.
이 정도를 원한건 아니지만, 이 또한 여행의 묘미니까 그냥 몸을 맞기기로 했다.
바버는 최선을 다해 머리를 잘랐다. 머리가 다 잘린 다음에는 샴푸를 하기 전에 머리에 왁스를 발라 전체적인 스타일을 보여줬다. 머리를 올렸더니 만화책에서 볼법한 일본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내려달라고 했다.
샴푸가 끝나고 면도가 시작되었다. 스팀타올이 뜨끈하게 올라왔다.
이발소에서의 날 면도는 이번이 인생 처음이었다.
이상했다.
내가 아는 면도는 피부를 잡아 가며 조금씩 밀어내는 느낌이었는데 이 바버는 넓은 면적을 한번에 쓰윽 밀어냈다.
나는 이날을 위해 이틀간 면도를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억센 수염들이 제대로 밀리고 있을지 의심되었다.
턱을 면도할 때도 넓게 한번에 밀어냈는데 면도를 하는건지 피부 박피를 하는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아팠다. 피부가 화끈거렸다.
바버는 능숙하게 오일을 바르고 피부를 진정시키는듯 했지만 내 체감은 그렇지 못했다.
인중과 턱이 계속해서 화끈거렸다. '원래 이런건가?'
간질간질한 귀청소까지 끝나고 바버샵을 나왔다.
찬 바람이 턱 주변을 스칠때마다 화끈거림이 가시지 않았다. 첫 경험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나중에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았다.
턱 여기저기에 피딱지가 굳어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 여행지에서의 시작을 바버샵에서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 같다.
오늘의 여행은 제법 걷는 일정이었다.
처음 목적한대로 단풍 구경을 하는 날이었다. 찬바람을 역으로 받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첫번째 목적지는 도쿄 시내 은행나무 단풍으로 유명한 신궁 외원 은행나무 거리
https://maps.app.goo.gl/SRsnG5JePjWH3uzf9
메이지 신궁 밖 길 옆으로 나란이 길게 늘어선 은행나무가 잘 조경되어 서있는 곳으로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단품을 보러 찾는 곳이다.
평일임에도 대낮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여의도 벚꽃축제처럼 차도를 막고 행사를 하는게 아니라서 중앙으로 차가 다녔지만 용감히 차도로 내려가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 보였다. 도쿄의 날씨는 아직 완연한 가을이 아닌건지, 중간중간 푸릇한 은행나무도 보였다. 한국의 날씨와 너무 달라 이질감이 들었다. 비록 턱은 화끈거렸지만 눈에 들어온 노란빛의 향연에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가방안에 우산과 물이 들어있었지만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번 여행은 왠지 성공적일 것 같았다.
길을 그대로 걸어 신주쿠 공원 (신주쿠 교엔)쪽으로 향했다.
지난번 도쿄여행때 근처까지 와놓고선 정작 둘러보지 못해서 아쉬움이 남았던 곳이다. 신주쿠 교엔은 입구가 세 곳인데, 그중에서 남쪽에 있는 신주쿠 교엔 센다가야몬으로 향했다.
https://maps.app.goo.gl/qZUAaRhesKSsuhyi8
입장료는 500엔. 날씨가 선선하고 맑았기 때문에 그늘과 양지를 오갈때마다 느껴지는 계절감이 달랐다.
https://maps.app.goo.gl/tfoz3UygmkPoCyxg7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복사 붙여 넣기에 가까울정도로 현실을 애니메이션에 녹여낸다. 신주쿠 교엔뿐 아니라 근처 건물과 신호등도 애니메이션을 주의깊게 봤다면 모두 찾아낼 수 있을 정도이다.
높게 솟은 나무와 길게 뻗어진 광장을 보면서 재미있게 보았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언어의 정원'속 정자를 찾아 걸었다.
이 정자는 이제 제법 유명해져서 많은 사람들이 근처에 머물러있었다. 하필 단풍나무 하나도 멋지게 피어 있어서 단풍을 찍는 사람들도 정자 근처에 많이 모여 있었다. 남자 한명은 여행중 일본인 친구가 생겼는지 손짓 발짓과 영어를 섞어가며 서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비오는 날 주인공 타카오가 유카리를 만났던 그 공간, 타카오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숙소를 나온 이후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다는걸 깨달았다. 이제 조금씩 백팩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무게를 조금이나마 줄이면 좋을 것 같았다. 물을 꺼내 마셨다.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들이 보았을법한 공간을 바라보았다. 날이 조금 흐렸는데, 나는 이런 날씨를 더 좋아했다.
사실 비가 조금 와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했다.
가만히 있으니 바람이 쌀쌀하게 느껴졌다.
정자 밖으로 또 한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오는게 느껴졌다.
정자에서 나와 길을 조금 더 걸었다. 작은 언덕위에 작은 집이 있었는데 지도를 보니 쇼텐테이라고 이런저런 주전부리를 파는 곳 같았다. 걸음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리뷰에 보이는 아이스크림을 보니 단 것이 먹고 싶어 방문했다. 말차가루를 뿌린 아이스크림에 작은 전병과 떡을 먹으면서 창 밖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구름을 헤치고 햇빛이 드리워졌다.
햇빛은 가을 햇빛이었다 따가워보였다. 잠깐잠깐 드리우는 그늘은 으슬한 느낌을 선사했다.
저 너머로 언어의정원에 자주 등장했던 NTT 도코모 요요기 빌딩이 보였다.
단풍이 피는 가을보단 벚꽃이 피는 봄에 오는게 더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많이 들었다.
신주쿠 방면 출구로 나왔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인파가 늘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길을 걷다보니 지난 도쿄 여행에서 마지막날 저녁을 먹었던 모토무라 규카츠의 닫힌 문이 보였다. 괜시리 반가웠다. 근처에 있는 빔즈 재팬에 가보기로 했다. 이번 여행에서 빔즈 몇곳을 다니면서 간단한 소품이라도 사볼까 생각을 했었다.
빔즈 재팬은 건물 전체를 사용하고 있고 층별로 테마가 달랐다. 가장 눈에 들어온건 니들즈의 가디건이었는데 가격이 3만엔이라 만져만 보고 얌전히 내려놓았다.
이런저런 눈이 가는 소품들이 있었는데, 이따 시부야 빔즈도 들릴 예정이라 눈으로만 구경하고 내려놓았다.
신주쿠역 2층에 '버브 커피'가 있다. 커피 맛에 대한 평이 매우 좋아 오늘의 커피는 이곳에서 마실 예정이었다. 중간중간 쉬었지만 왠지 발이 벌써부터 아팠다. 예전에는 하루종일 걸어다녀도 괜찮았는데 나이가 든걸까? 아니면 신발 선택이 잘못된걸까?
https://maps.app.goo.gl/bnk7UNJs1XaBJmPP7
복잡한 신주쿠 역을 헤매고 나와 드디어 버브 커피를 찾았다. 따뜻한 라떼 한잔을 주문하고 주머니를 뒤졌다. 신용카드인줄 알고 꺼낸건 알고보니 호텔 방키였다. '이상하다 분명 바버샵에서 결제를 하고 오른쪽 호주머니에 넣어놓았었는데?' 일단 현금으로 결제하고 자리에 앉아 가방 주머니를 뒤졌다. 어디에도 카드가 없었다. 한국에서 엔화가 쌀 때마다 환전해놓고 이번에 가져온 트레블 월렛 카드다.
이번 여행자금의 많은 비중이 이 신용카드로 이용될 계획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가장 마지막으로 결제를 한 곳이 바버샵이니 연락을 취해야하는데, 내가 사용하는 현지 유심은 전화 통화를 지원하지 않았다. 다시 록폰기까지 가봐야하나 하다가 바버가 나에게 주었던 명함이 생각났다. 명함에 바버의 인스타그램 주소가 있었다. 내 인생 최초의 DM이 잃어버린 신용카드에 대해 바버와 나눈 내용이 되었다. 신용카드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자 이후의 모든 일정이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오늘의 주 일정은 단풍구경과 신주쿠, 시부야에서의 쇼핑이었다. 하지만 초조해진 마음에 돈을 쓰겠다는 생각은 메말라 버렸다. 일단 시부야로 이동하기로 했다. 어짜피 저녁도 시부야에서 먹고, 숙소로 돌아가려면 시부야가 조금 더 편할 것 같았다. 도쿄 메트로 72시간권을 꺼냈다.
시부야에서는 로프트 시부야와 빔즈 멘 시부야, 빔즈 재팬 시부야를 들렀다. 도큐핸즈도 들렸다. 하지만 솔직히 아무것도 눈에 안들어왔다. 숙소에 돌아가 가방을 뒤집어 엎어봐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결국 둘러보는걸 포기하고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다. 기름진 라멘 국물이 아니라 마치 소고기 뭇국 같은 국물을 사용한다는 카무쿠라 라멘에 들렀다. 여행 첫날인데 참 재수도 없지 하며 만두에 맥주까지 시켜서 배부르게 먹고 나왔다. 빨리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https://maps.app.goo.gl/HdpmW1JuBWBZAjZy7
시부야 지하철 역에서 왼쪽 주머니에 넣은 72시간권을 꺼내려고 하다 몸이 굳었다.
없었다.
말이 안된다 생각했다. 어떤 소매치기가 하루종일 나만 따라다니나? 아니면 바지 주머니에 구멍이라도 났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72시간권은 다른곳에 있을 가능성도 없었다. 무조건 왼쪽 주머니에 넣었고 그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신용카드처럼 사용한지 두시간도 넘게 지내서 가물가물한 그런 상태가 아니었다. 이번 여행은 뭔가 크게 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내가 오랫만에 여행이라 긴장도 주의력도 높이지 못하는걸수도 있다. 어쩌면 주머니가 얕은걸수도 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맥이 탁 풀리고 스스로가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에서 도쿄로 들어올 때 사용했던 스이카 카드로 숙소로 돌아왔다. 가방을 탈탈 털어보았지만 신용카드도 메트로 패스도 보이지 않았다. 깊은 패배감이 들었다. 남은 여행동안 현금으로만 생활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해외결제가 되는 다른 신용카드가 있지만 스스로의 안일함에 약간의 벌을 주고 싶었다. 사고 싶었던 물품들을 정리한 글을 보면서 하나씩 지워갔다. 포기할건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남은 현금을 다 꺼내서 계산을 해봤다. 무조건 사용해야하는 부분이 있다. 꼭 먹기로 했던 식당 두 곳과 이미 예약을 해버린 헤드 스파. 이 두가지만으로 약 2만엔을 무조건 굳혀놓아야 했다. 내일부터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움직이기로 했다. 오늘 도움이 안된 바지와 잠바는 당분간 입지 않는게 좋을 것 같았다.
비가 온다더니 정말 저녁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제법 이른 시간이지만 호텔에 들어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창밖의 도쿄 타워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밤이었다.
원래 와인을 한병 사서 마실 계획이었지만 그냥 편의점에 가보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유명하다는 이것저것들을 샀다.
몇 개는 내일 먹기로 했다.
맥주를 한잔 마셨다.
오늘의 무방비때문인지 시원함이 쓴 맛처럼 느껴졌다.
단맛의 푸딩으로 혀와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여전히 숙소의 뷰는 마음에 들었다.
저 멀리 도쿄 일루미네이션이 보였다.
내일은 방심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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